Terra Brandford.
Material: 4B&H pencil, Sketch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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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밤의 추위는 매서웠다. 그날따라 바닷가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새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부산히 몰려오는 작은 파도의 무리는 공허함을 깨는 메아리처럼 아우성쳤다. 싸늘하고 적막하기까지 한 이곳 해변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 하지만 갈 곳을 잃은 한 중년의 남자가 마침내 이곳 해변의 모래사장에 도달했다. 모래사장 너머 새롭게 단장한 커다란 여관은 야광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그 야광을 등지고 공허한 모래밭 위에 서서 일렁이는 암흑 바다를 마주하였다. 파도는 마치 깊은 심연 속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났고 그에게 점진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한동안 춤추는 파도의 유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파도의 파장은 춤추듯 출렁이며 그를 향해 몰려왔지만, 그의 발끝에 도달하기 전에는 모두 소진되고 없어져 버렸다. 그는 그것마저 아쉬운 표정을 보였다.


여기에 오기 직전 마셨던 벌꿀주의 술기운에 그의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바닷바람은 뜨거운 그의 몸을 식혀주었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검은 바다 위에 눈에 띄게 대조적인 파도의 하얀 거품을 바라보며 싸늘한 바닷바람을 만끽하였다.


태어나자마자 온 힘을 다해 그를 향해 달려온 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바다 위의 무수히 많은 파도 조각들. 뜨거운 불은 재라도 남기지만, 저 파도는 무엇을 위해 열정적으로 한순간을 살고 사라져 버리는 걸까. 만일 그들에게도 삶이 존재한다면 일 분도 채 안 되는, 하루살이보다 더 짧은 조각 같은 인생일지라. 만약 파도 같은 생이 그에게 주어진다면 과연 그는 그 순간 무얼 하고 떠날 것인가? 조금은 바보 같은 가정인 줄 알면서도 그는 눈앞에 보이는 파도와 같은 생을 사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그에겐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을 것만 같았다. 인연? 소유? 명예? 깨달음? 그토록 짧은 생에선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할 터. 세상에 의미 없는 흔적을 남길 바엔 그냥 저 파도처럼 아무런 흔적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성자가 되기에는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저 파도처럼 너무 짧다고 느꼈다. 인간은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 지라. 얻는다 할지언정 미완으로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성자들이 그러한 미완의 깨달음을 마치 진리인 양 세상에 전파하고 다닌다는 사실에 그는 치가 떨렸다. 그는 결국 인간이 한평생 살지언정 깨달음을 얻진 못한다고 생각했다. 도리어 저 파도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냥 아무 흔적이 사라지는 것이 어쩌면 성자로서 최선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간혹, 세속을 피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났다는 어느 성자들의 이야기가 이제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들처럼 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과거에 저지른 자신의 어리석은 잘못을 떨쳐내고 싶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파도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의 발이 서서히 바닷물에 잠겼다. 뼛속까지 잠식해오는 냉온의 아찔함을 견디며 그는 그대로 직진했다. 그는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을 눈앞의 검은 바닷속에 모두 내던져야만 했다. 그는 끊임없이 몰려오는 파도에 저항하며 조금씩 전진하였고 어느덧 그의 몸은 검은 바다의 심연 속으로 완전히 잠기고 말았다.


에드문드는 한때 미덕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그가 성인이 되던 날,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숭고한 이들 앞에서 정의로운 삶을 살기로 맹세했다.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을 때 그의 영혼은 그들로부터 영성을 부여받았다. 신성한 영혼은 그의 정신을 맑게 했다. 그가 이전에 바라보았던 세상은 모두 사라졌으며 모든 만물이 새로운 가치와 희망으로 반짝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빛을 더욱 밝게 비추리라 결의에 가득 찬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났다. 


영성을 부여받은 그는 성자의 길을 가야만 했다. 영성을 위한 기본 자질은 동정, 희생, 정직, 그리고 숭고였다. 그는 선대 위인들의 숭고한 정신을 따르기 위한 미덕을 한순간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길을 떠나면서 어렵고 힘든 이들을 동정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거리낌 없이 행하였다. 그는 수행을 지속하며 깨달음을 얻었으며 이를 전파하였다. 선행도 지속하였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선지자라고 칭하였다. 그는 십 년을 쉬지 않고 떠돌면서 세상에 자신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 찾아갔다.


그러던 그는 수도 중에 우연히 한 작은 시골 마을에 다다랐다. 그 마을은 서쪽 깊은 산골짜기에 있었는데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마을은 겨우 스무 가구가 살 만큼 매우 작았다. 이곳에 막 도달했을 때 에드문드는 떠들썩한 거리의 광경을 목격하였다. 주홍 머리칼의 한 젊은 여인이 거리에서 주민들로 보이는 이들에게 몰매질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몰매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증오하고 경멸하였다. 이유인즉슨, 그녀가 외도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마을에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인성이 그릇됐다고 하면서 그녀가 돈을 벌러 간 남편에게 배신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고 하며 그녀를 마을에서 쫓아내려고 하였다. 여인은 옷이 여기저기 찢기고 온몸이 피멍이 든 채 거리에 쓰러져 흐느껴 울고 있었다. 남자는 그 여인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제치고 나선 그는 자신이 에드문드 수도승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에드문드라는 이름에 모두 놀라 했다. 그 외딴 마을마저 이미 이 존경스러운 선지자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는 그녀를 업고 그 마을을 벗어났다. 


마을 인근에 버려진 작은 오두막에 그녀를 데려온 남자는 그녀를 잘 보살펴 주었다. 그녀에게 물과 음식을 주었고 흙과 함께 피부에 말라 굳어버린 피를 닦아주었다. 찢어진 그녀의 피부에 약을 바른 후, 약초와 헝겊을 덧대 상처가 아물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였고 종일 아무 말도 없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고 그저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자정을 지날 무렵,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그녀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선잠에 빠져있었던 에드문드는 바로 잠에서 깨어나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남편이 돈을 벌기 위해 북쪽의 금광으로 떠난 후,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았어요. 안데라스라는 청년이었죠.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그는 햇살처럼 따사로운 남자였어요. 특히 눈이 예뻤고 미소는 달콤했죠. 어느 화창한 봄날의 토요일 오후, 마을의 호수에서 그와 처음 마주쳤어요. 그는 호숫가에 앉아서 따스한 봄날의 정취를 홀로 만끽하고 있었죠. 저는 한눈에 그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저희 마을은 매우 작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거든요. 그는 떠돌이였는데 우연히 이곳을 찾아왔다고 했어요. 마치 선생님처럼요. 저를 마주한 그는 저에게 마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죠. 때마침 홀로 산책에 나섰던 저는 말동무가 생겨서 좋았어요. 그와 함께 호숫가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었죠. 우리 마을에 대해서 특별히 해줄 이야기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는 저에게 다양한 경험을 공유해 주었어요. 그가 다년간 여행을 다니면서 겪었던 이야기는 저에겐 매우 놀랍고 황홀하기만 했죠. 제가 가보지 못했던 지역의 문화와 음식 그리고 유적지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책에서 읽었던 것과는 아주 달랐어요. 그의 이야기는 훨씬 더 생동감이 넘쳤고 마치 제가 그곳에 간 것과 같은 경험을 선사해 주었죠. 그의 말솜씨는 재능있었어요.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간가는 줄 몰랐죠."


아늑하게 타오르는 촛불과 그녀의 붉은 머리칼은 이질감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있었다. 그녀의 초췌한 얼굴마저 수줍은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홀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결국 저녁에 같이 식사를 하게 됐어요. 그는 저와 더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죠. 아뇨, 사실 제가 먼저 그를 집으로 초대했어요. 사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제 몸은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저는 이미 알게 되었죠. 제가 이미 그의 매력에 빠져버렸다는 것을. 모르겠어요. 그냥 그는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그의 외모는 물론, 그에게서 풍기는 표현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뭐라 표현해야 할지. 선생님께서는 제가 더러운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으시겠죠. 하지만, 본능을 제어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요? 사실 그와 더 같이 있고 싶었고 어두운 밤 그를 저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은 제 남편을 기만한 행동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죠. 남편은 저 먼 곳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금광을 캐고 있었겠죠. 하지만, 제가 남편을 떠나겠다고 다짐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저 단 하루, 마치 족쇄에 꽁꽁 묶여버린 듯한 저의 말라버린 영혼에 자유를 주고 싶었어요. 가여운 제 본능에 자유를 허락하고 싶었어요. 제 인생에서 잊어버린 뜨거움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어요. 차라리 그날 죽어버릴지라도 후회 안 할 만큼 저는 그 갈망에 허덕이었죠. 결국, 그날 밤 그에게 제 몸을 허락하였고 우리는 잊지 못할 한순간을 같이 보냈어요."


남자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그녀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녀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다음날 안데라스는 마을을 떠났어요. 멀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말이죠. 정말 그는 바람 같은 인생을 사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같지 않나요? 정착만 해 온 저에게는 조금은 부러울 따름입니다. 이제 저희는 다시는 만날 일은 없겠죠. 그럴지언정, 저는 그를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해요. 남편에게는 비밀이지만 저는 제 인생을 살다가 간혹 그날을 회상할지 모르죠. 그와 단 하루, 뜨거운 사랑을 속삭였던 그 순간 말이죠. 일 년 전, 집을 떠난 제 남편을 하루하루 기다리면서 지쳐 말라버린 저의 정신과 육체에 그는 맑은 샘물과도 같았어요. 제 얼굴을 마주하던 그의 부드러운 미소, 어린아이처럼 달콤한 입술. 그리고 따스한 체온.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의 뜨거운 심장 고동 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져 저의 가슴에 도달하는 순간, 저는 그 요동에 심장이 터질 듯 미쳐버리는 줄 알았죠. 남편을 처음 만난 이래로 잊고 있었던 사랑의 달콤함을 느꼈어요. 정말 오랜만이었죠."


"정말 아이러니해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육체적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구속해야만 하죠. 그리고 그날 하루, 우리는 우리 둘의 육체와 영혼이 불꽃처럼 타올랐고 마치 전소하듯 사라져 버렸죠. 그리곤 타고 날아가 버린 연기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그렇게 우리 둘의 관계는 끝이 났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가 말했다.


"여인, 사랑은 고귀하고 육체적 욕망은 신이 주신 자연의 섭리지. 그것을 부정할 순 없다오. 여인의 그 욕망을 그 누구도 비난할 순 없지. 세상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오. 그들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때로는 내면엔 그러한 욕망을 주최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오. 나라고 다를 바 없지 않소. 하지만, 잘 들어보시오. 이 일이 당신과 그 안데라스라는 청년 둘 사이의 관계로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여인의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가 받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오? 신은 인간에게 육체적 욕망을 부여하기 전에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정신과 감정의 능력을 주었소. 여인처럼 모두가 그걸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이 세상은 결코 용납될 수 있는 사회가 되고 말 것이오. 보시오, 이 일로 인해 결국 여인은 마을에서 쫓겨났고 큰 상처를 받지 않았소?"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그럴지언정, 저는 인생에서 단 하루, 잊지 못할만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 제게 그렇게 후회할만한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어두운 방에서 제 옆에 있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며 혼자 보내는 그 시련은 그 어떤 고통과도 바꿀 수 없었어요. 제 꽃은 시들었고 남편을 미워하기 시작하였죠. 제 마음의 상처는 커져만 갔어요. 오히려 지조를 지키는 동안 제 영혼과 육체는 병들어 가는 듯했어요. 지독한 고독의 시련은 제 영혼의 공간에서 독처럼 검게 퍼져나갔죠. 그 날, 안데라스를 호숫가에서 외면했다면, 저는 분명 그토록 달콤한 경험을 제 인생에서 해보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잊지 못할 보석 같은 경험을 하였고 그 날 이후 저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 듯했어요. 그날을 후회하지 않아요. 제 인생의 한 공간에는 분명 안드레스가 존재할 테니깐."


여인은 깊은 한숨을 내뱉은 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제 남편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겠죠. 그리고 그렇게 영원히 모를지도 몰라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 때문에 남편이 힘들고 괴로워하는 것을 저 역시 원치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세상이 제가 희망한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겠죠? 물론 그러기 전에 저는 남편에게 편지를 보낸 후, 이 마을에서 멀리 벗어나 남편과 새롭게 시작할 거예요. 마을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말이죠. 남편이 이 사실을 모르게 하고 싶어요."


여인이 남편을 속이고 싶어 한다는 말은 에드문드에게 가시거리처럼 들렸다. 에드문드에겐 거짓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성자의 길을 걷는 동안, 무수히 많은 일을 겪었다. 거짓과 속임수는 결국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진리는 틀리지 않았었다. 진실은 선하다는 사실을 그는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다. 에드문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님, 저는 제가 무얼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어요. 지조가 없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어요.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을 피하지 못했던 저 자신을 원망하면서도 저는 한편으로는 기뻐요. 기쁘다고 표현한다면, 분명 선생님은 저를 이해하지 못하실지도 몰라요. 하지만..."


"여인, 죄를 지은 자가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것처럼, 불의에 대한 정의가 없으면 사회는 파괴되고 말 것이오. 마을 사람들이 여인을 손가락질하고 마을에서 쫓아낸 것도 나는 이해할 수 있을 듯하오. 여인이 기쁘다는 사실도 진실이라고 믿소. 하지만 여인의 그 거짓된 욕망이 결국엔 여인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갈 것이오. 남을 배신하고 거짓으로 그것을 감추려고 하는 자세는 옳지 않소. 진실은 선하다는 진리를 잊지 마시오. 진실을 구하되 용서로서 상처를 치유해야만 하오. 여인은 고해하고 죄를 뉘우친 후, 남편과 마을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오. 그것이 사람으로서 할 도리라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바닥에 떨구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생님마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마을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겠어요. 남편이 돌아오는 날, 그에게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겠어요."


다음날 이른 새벽, 여인은 성당을 찾아가 고해를 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마을로 향하였고 에드문드는 오랜 여정으로 인한 피로로 그녀가 오두막에서 떠났는지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에드문드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방 한구석에 잠을 청했던 여인은 없었다. 그는 그녀가 이미 마을로 향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간단한 채비를 마친 그 역시 마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의 성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에드문드는 또 다른 부산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여있었는데, 이번에는 뭔가 더 큰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다고 에드문드는 직감했다. 그는 성당 앞에 버려진 듯 놓여있는 피투성이가 된 싸늘한 여인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어젯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아..."


그녀를 못마땅하던 주민들이 결국 홧김의 동조로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에드문드는 전신에 힘이 빠지듯 휘청거렸다. 마치 이 일의 경위가 자신의 책임인 양, 보이지 않는 육중한 무게가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거기엔 특정한 살인자도 없었다. 하지만 곧, 그는 이 일의 결말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죄를 지었으며, 그에 대해 대가를 받은 것이다. 그녀는 경솔했으며 그녀의 이기적인 마음이 이 일을 좌초한 것이었다. 이 결말은 그녀의 잘못에 대한 처벌이었다. 안쓰러웠지만, 이제 돌이킬 수도 없었다.


에드문드는 그녀의 시신을 그녀가 안드레스를 만났다던 그 호수가 인근에 묻어주었다. 에드문드는 그 마을을 황급히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성자로서 해야 할 도리가 아니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였고 그의 영성을 사람들에게 실천해야만 했다. 이후, 그는 마을 인근의 버려진 그 오두막을 손질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전파하는데 몰두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가 그 마을에 머문 지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죽은 여인의 묘지에는 어느덧 풀이 무성했고 호숫가의 버드나무 이파리가 산들거리는 어느 봄날인 무렵, 어느 한 건장한 남자가 마을에 다다랐다. 그는 죽은 여인의 남편이었다. 그 남자는 그의 아내가 죽었는지도 모른 채, 한때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자신 아내의 모습만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한가득 보따리를 매고 즐거운 귀향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그가 마을에 도착했을 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다. 그의 아내가 자신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한동안 버려져 있었던 자신의 집을 찾아갔으며 곧 그녀가 이 마을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동안 아내로부터 편지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해가 되었고 그는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한 편, 농사일하고 있었던 에드문드는 죽은 그녀의 남편 복귀 소식을 듣고 곧장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에드문드가 집에 도달했을 땐, 남자는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슬픔에 잠겨 있었다. 에드문드는 그에게 그녀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마치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의 죽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에드문드에게 바로 되물었다. 에드문드는 그를 그의 아내의 무덤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있었던 일을 그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망연자실한 채 그녀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가 질 무렵, 호숫가에는 핏빛 석양이 물들어 있었다. 에드문드와 남자는 여전히 여인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혼잣말을 하듯 성자에게 말을 했다. 


"얼마나 그녀가 외로웠을까. 그녀가 그날 어느 젊은 청년과 눈이 맞았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를 따라 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단 말이오. 그녀는 계속 나를 기다렸을 것이오. 그녀가 그날 외도를 했건 말건, 난 그러한 그녀의 모습조차 사랑할 수 있는 그녀의 남편이오. 그녀를 탓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소. 애초에 그녀를 두고 간 건 나였소. 되레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내가 죄인이오."


두 눈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 건장한 남자의 두 눈동자에는 괴로움으로 가득 찼다. 에드문드는 깊은 후회와 절망에 빠진 그를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저녁 자정을 넘은 시각, 마을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여인들의 빨래터이자 작은 야외 회의장이 있는 마을의 중심지의 우물가엔 한 남자의 무거운 노랫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그녀가 있는 곳까진 그리 멀지가 않네


눈을 감은 당신은 먼저 나를 떠나갔고


어두운 그림자 후회로 흐느끼네


당신은 멀리서 나를 기다리네


나는 신께 맹세하오


지금 나 어둠과 함께 걸어갈 테니


그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촛불이 불타듯 내 마음도 간절하니


이제 그곳에서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내 몸은 가벼우니 


한숨을 쉰 후, 지금 당장 발걸음을 옮긴다



곧이어 그 작은 마을에는 뜨거운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남자는 마을을 뛰어다니며 미리 준비한 기름과 불통을 불이 탈 만한 곳 여기저기에 마구 던졌다. 헛간의 볏짚에 던졌으며 지붕 위로 던졌다. 집이 겨우 스무 채 되는 이 작은 마을을 지워버리는 일은, 미쳐 실성한 한 남자에게 있어서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곧이어 마을의 모든 집은 불길에 휩싸였으며 주민들의 비명, 통곡 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한 편, 마을의 밖 오두막집에서 잠에서 뒤척이던 에드문드는 멀리 마을 위 붉게 번뜩이는 저녁 밤하늘에 결국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오두막에서 나와 마을을 향해 바라보았다. 삼키듯 타오르던 마을의 화염은 마치 악마 같은 연기로 서서히 뒤덮이고 있었다. 그는 불타는 그 마을의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충격에 휩싸였으며 그의 심장은 두려움에 요동을 쳤다. 그는 눈앞의 그 공포를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다. 불타는 마을에는 죽은 여인의 환영과 절망에 빠진 남편의 환영이 같이 일렁거렸다. 남자는 화염의 도시를 등지고 어두운 산자락 속으로 엉거주춤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화염의 불길로부터 도망치는 동안, 그는 그동안 그가 걸어온 성자의 인생이야말로 경솔했고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진실이 선하다는 그의 신념은 산산이 조각나며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 진실은 결국 파멸을 몰고 왔다. 그곳엔 모두를 위한 세상은 결코 없었다. 그의 눈앞엔 어떠한 선도 없었으며 그곳은 증오와 희생만이 존재했다. 그의 신념은 한 작은 마을에 파멸만 몰고 왔을 뿐이었다. 그를 믿던 사람들은 그렇게 화염의 불길 속으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에드문드는 혼돈의 나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듯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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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inter soldier.
Material: 4B&H pencil, Sketch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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